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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특집-위기의 대한민국, 다산에게 길을 묻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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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5월 08일(월) 09:42 [i주간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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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도를 넘는 극단주의와 황금만능주의, 도덕불감증,“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되고, 정직하게 양심껏 순리대로 살아가면 손해 본다”는 식의 오도된 가치관이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이 같은 현상은 사회지도층으로 올라 갈수록 더 심각하다. 한마디로 위기 상황이다. 작금 대한민국은 200년 전 다산선생이“이대로 가면 조선은 반드시 망한다”며 개혁이나 경장보다 더 강력한 변통(變通)을 강조했던 시대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이에 본지에서는 기획특집으로“다산정약용의 위민변통사상(茶山 丁若鏞의 爲民 變通思想)”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다산변통사상연구소장 마중물 김만수 박사와 함께 그 해법을 찾고자 한다.
다산 정약용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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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i주간영덕 | | 마중물 김 만 수(정치학박사)
다산변통사상연구소장
경상북도인재평생교육진흥원 학숙본부장
정약용(1762~1836)는 조선 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4서 6경(四書六經) 등 전통유학을 실학적 측면에서 재해석한 실학 집대성자이자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등 한자가 생긴 이래 양질에서 가장 많은 54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자는 다산(茶山), 호는 사암(俟菴),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
특히 조선 500년 역사는 성리학의 역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에 다산은 실생활에 활용할 수 없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라며 성리학에 매몰되어 ‘孔子 曰 孟子 曰’만 찾는 당시 사대부들을 실란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다산은 이미 200년 전 중국과 조선은 물론 아시아 전체가 왕정군주정체시대(王政君主政體時代)에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을 거론하기도 했다. 즉 그는 민(民)을 역사발전의 주체로 간주함과 동시에 백성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다산의 주장에 의하면 “진정한 권력의 주체는 위정자(爲政者)들이 아니라 바로 민(民)이며, 따라서 위정자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民을 위함에 있다”는 것이다. 다산은 한걸음 더 나아가 권력 탄생의 근원을 “태초에는 민이 주체가 되어 선거를 통해 마을의 이장(里長)에서부터 군주(君主)에 이르기까지 상향식-단계별로 치자를 뽑았고, 모든 법의 제정과 행정조직 및 병제 또한 민의 의사를 바탕으로 상향식으로 이루어졌으나, 한(漢)나라 이후 본말(本末)이 전도되어 역(逆)이 순(順)이 되고, 순이 역이되었기 때문에 치자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할 경우 民은 언제든지 치자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적임자로 교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행위이며, 이는 마치 무대 위의 지휘자가 신통찮을 경우 그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능력자로 교체하는 것과 같다.”며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용인하고 있다. 즉 다산에게 있어 정치(原政)란 “잘못된 모든 것을 원래대로(原) 바로 잡는 것(正)”이며, 그의 철학과 사상의 핵심은 철저하게 民의 입장에서 잘못된 법과 제도의 혁신적인 변통(變通=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그것이 한계에 이르러 막히면 반드시 이로운 방향으로 뚫어야 변하고 소통되며, 변하고 소통되면 오래도록 유지된다)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민주체사상(民主體思想)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산 변통사상의 핵심은‘민권강화’
결론적으로 다산 변통사상의 핵심은 전통적 유학이 추구하는 민본(民本)을 넘어, 민권강화에 표적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즉 원시유학에서 강조하는 민본위민사상은 치자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의 위민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다산은 민에게 참정권과 저항권, 평등권 등의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치자와 민을 대등한 관계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다산에게 있어서의 민본과 위민은 민의 당연한 권리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때문에 목(牧, 리더)의 존재 이유는 권력의 주체인 민의 삶의 질 향상에 있다는 것이 다산의 논리이자, 다산 변통사상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다산의 혁명적경세관(革命的經世觀)은 어떻게 성립된 것일까?
모든 인간의 사유체계는 사회화 과정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와 시대 상황, 그리고 그가 남긴 3천여 편의 시(詩)와 서(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자.
4세에 천자문, 10세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수학
22세에 성균관 입성, 정조의 학문적 동지로 총애받아
31세 때 수원성 축조 시 거중기 개발로 예산 절감
33세 경기암행어사, 36세에 곡산부사로 임명
다산이 자신의 일대기를 나름 소상히 밝힌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의하면, 다산은 1762년 6월 16일(영조 38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남양주시 와부면 능내리)에서 5대에 걸쳐 옥당(玉堂/왕의 학문적 자문역)을 지낸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천연두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한의사 이현수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며, 네 살 때 천자문을 익혔다. 또한 7세 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산(山)」이란 제목의 시를 지어 그의 명석함에 주변을 놀라게 했다. 10세에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수학하는가 하면 삼미자집(三眉子集)이란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16세에는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유고집을 보면서 사숙했고, 18세부터는 금기시되었던 서양학문에 심취하여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 강학회(强學會)에서 촛불을 켜 놓고 경전에 대한 토론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이후 22세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성균관에 입성하면서 23세에 중용강의 80여 항목을 정리하여 정조를 감탄케 했다. 뿐만 아니라 28세까지 십 수차례 과거시험에 수석 합격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30세 사헌부 지평시절 정조에게 시경의(詩經義) 800여 조를 지어 올려 정조로부터 “널리 백가를 인용하여 문장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 무궁하니, 참으로 평소 학문이 축적되어 해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훌륭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31세 홍문관 수찬(修撰) 시절 수원성 축조 시 ‘거중기’ 개발과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공기를 단축함으로써 엄청난 예산을 절감하기도하였다. 33세 때(1794, 정조 18)는 경기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성균관 직강(直講), 사간원 사간(司諫), 동부승지, 병조 참의, 규영부(奎瀛府) 교서승(校書承), 병조 참지(兵曹參知) 등의 관직을 거쳐, 그의 나이 36세인 1797년(정조 21)에는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에 홍역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의술서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을 저술하여 고질적인 역병치료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38세에는 황주 영위사(黃州迎慰使), 병조 참지 등 다산은 뛰어난 학문과 천재성을 인정받아 정조로부터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이자 정치가로 종횡무진, 승승장구하였다.
뛰어난 학문과 천재성이 정적들의 표적의 대상이 되다
정치‧학문적 동지 ‘정조 사망’으로 고난의 18년 유배생활
유배지 강진‘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 등 5백여권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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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i주간영덕 | | 그러나 다산은 오히려 이 같은 뛰어난 학문과 천재성 때문에 항상 이를 시기한 정적들의 표적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되던 1800년 6월 정조(正祖, 1752-1800)가 갑자기 승하하자, 그는 스스로 신변의 위험함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다. 그리고 그는 초천(苕川) 별당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당호의 의미처럼 “매사에 주저하기를 겨울에 냇물의 살얼음판 위를 건너듯이 조심조심하며, 사방에서 누군가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항상 경계하라”는 노자의 말을 가슴에 세기며 경전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정조의 승하와 함께 의지하거나 보호해줄 세력이 없었던 다산은 요한(Johan)이라는 그의 세례명이 말해주듯 정권 실세이자 정적인 노론(老論)들의 주도로 자행된 신유교옥’(辛酉敎獄, 1801)사건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신유교옥은 다산의 집안을 풍비백산으로 만들었다. 다산 자신의 표현대로 동복의 3형제가 감옥에 갇히고, ‘일사이적’(一死二謫)이라는 용어대로 맏형 약종은 참형을 당하고, 둘째형 약전과 다산은 유배형을 받는다. 그 때 다산의 나이는 40세였으며, 유배지는 경북 포항의 장기현 마현리이다. 유배 7개월에 접어들 무렵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정적인 노론벽파세력들은 다산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는다. 그러나 별다른 혐의가 인정되지 않자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면서 기나긴 유배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그때 당시 상황을 다산은 이렇게 회고한다. “이때 악당(惡黨)들이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알고 흐트러진 문서 더미 가운데 서교의 세 가지 원수라는 삼구설(三仇說)을 찾아내어 어거지로 정씨(丁氏)의 집에서 나온 문서라고 모함하여 드디어 약종(若鍾)에게 극률(極律)을 가하여 나에게 재기(再起)의 길을 막았다.” 그러나 강진에 도착한 그는 고달픈 유배생활을 오히려 하늘이 나에게 학문할 기회를 내려주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강진에 유배된 지 8년만인 1808년에 ????주역????과 ????상례????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한다. 이후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천여 권의 책을 구비하고 6경4서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여, 1816년경에 선진유학의 경서를 실학적 측면에서 재해석한 경집(經集)으로 모두 232권의 저술을 대체로 마쳤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 대 이후의 서(書)와 경(經)이라함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4서(四書)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5경(五經)을 말한다. 그런데 다산은 경학 중에서 진시왕 갱유분서로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던 ????악경(樂經)????을 복원하여 ????악서고존(樂書孤存)???? 12권을 별도로 저술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산은 1818년 해배되기까지의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經世學)에 심혈을 기울여 ????경세유표???? ·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였고, 미처 끝내지 못한 ????흠흠심서????는 해배 후 고향집에서 저술을 마친 후 자신의 1표2서가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그 해택을 입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임을 밝히면서 “6경과 4서로 몸을 닦게 하고 1표2서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으니, 이제 그 본(本)과 말(末)을 갖추었다. 그러나 만약 알아주는 이는 적고 나무라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天命)이 허락해 주지를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좋다.”고 까지 하였다. 이것은 원시유학인 육경사서를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재해석하여 집대성한 자신의 경집과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1표2서야말로 수신과 치국평천하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본과 말을 갖추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하다.
유배지에서 탐관오리들의 황포와 백성들의 참상 목도
소수가문의 독점 세도정치 강력비판하며 탕평인사 강조
저술 통해 썩고 병든 세상 치유하기 위한 방책 강구
그렇다면 그는 왜 일생을 바쳐 ‘변통(變通)’을 논했는가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다산이 살았던 당시 시대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그가 생존했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는 봉건사회의 해체기로 그 말기적 현상들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16세기말 임진왜란과 17세기말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의 조선은 전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농업 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에서는 고갈된 재정확보를 위해 과도한 세금을 징수해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지방관들은 온갖 협잡을 자행하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른바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등 삼정(三政)의 문란과 이를 둘러싼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권층 내부의 권력투쟁이 극에 달하여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특권층이 국가의 요직을 독점하고 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대다수의 백성들은 무전농민(無田農民)으로 전락하였으며, 학문의 경향 또한 성리학 일변도로 흘러 주자의 이름으로 정적을 탄압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 사회 병리현상은 그가 남긴 3,000여 편의 시(詩)와 서(書)에 잘 나타나 있다. 대표적 사례로, 「기민시(飢民詩)」에서는 오랜 기근과 굶주림으로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할 자들이 조정의 고관들임에도 오히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기막힌 형국을 보고 있자니 두 눈에 피눈물이 난다고 개탄하였다.
또한 백성을 솔잎에, 탐관오리들을 솔잎을 갉아 먹는 송충이에 비유한 「충식송(蟲食松)」에서는 “…송충이들이 자기 욕심만 채우느라 소나무를 지금 이리 죽여 놨으니 내 기가 치받쳐 오른다. 어찌하면 벼락도끼를 가져다가 네 족속들 모조리 잡아 이글대는 용광로에다 처넣어버릴까…”라고 탄식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배 초기인 1804년 여름에 낮술을 마시며 읊은 「하일대주(夏日對酒)」라는 시에서는 당시 안동 김씨(安東 金氏), 풍양 조씨(豊壤趙氏), 청송 심씨(靑松 沈氏), 남양 홍씨(南陽 洪氏), 반남 박씨(潘南 朴氏) 등 몇몇 가문이 모든 권력과 관직을 독점하여 대를 이어 민 위에 군림하는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같은 관직의 독점과 세습으로 인한 폐해를 「통색의(通塞議)」에서 “온 나라의 백성들을 다 모아 인재를 뽑아 올려도 오히려 부족한 판에 출신 성분과 정파, 지역 차별을 앞세워 몇몇 가문이 모든 권력과 관직을 독점하는 것은 유능한 인재 10명 중 9명을 버리는 것과 같다”며 탕평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다산은 그의 역저 1表2書 중 ????경세유표????는 책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경세(經世)는 국가를 경영하는 모든 법과 제도를 새롭게 개조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뜻이며, 유표(經世遺表)란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께 올리는 국가개혁론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없애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책으로 관리의 부임부터 해임까지 목민관이 반드시 준수하고 집행해야할 실무상 문제들을 각 조항별로 자신의 식견과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흠흠심서(欽欽心書)????는 죄수들을 재판함에 있어 억울함이 없도록 신중하게 심의하라는 형법서다.
다산의 내공은 시공을 초월하는 예지와 통찰력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육, 문학, 어학, 문화, 역사, 지리, 의학, 복지 등 그야말로 모든 영역을 광범위하게 넘나들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수박 겉핥기가 아니라 철저한 고증과 역사적 사례를 들어 문제를 제기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과녁은 언제나 오롯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하는 충정과 위민을 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해배 후에도 백성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구휼(救恤)하는 것이 목민관의 책무로 선진의술의 도입과 체제적인 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특히 국가 의료기관인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등 운영비 조달방안과 의료기관 활성화방안을 제시하는 등 의학과 의술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다산 의학은 단순한 의학상식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그는 당시 정권실세인 노론벽파들에게는 눈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배 이후 순조(純祖)와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익종(翼宗) 임종 때 ‘의약동참(醫藥同參)’에 초대되었던 점으로 보아 그의 의학수준은 어의(御醫)에 버금가는 의술과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뛰어난 의학자이자 명의였음을 알 수 있다.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변통밖에 없다”
부정부패, 당장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해야 그쳐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다산은 자신의 정적들에 의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유배지에서 탐관오리들의 도를 넘는 부정부패와 그 틈바구니에서 고통 받고 있는 선량한 민초들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에 그는 이러한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그윽이 생각하건대 어느 하나 털끝만한 것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그칠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찌 충신과 지사가 팔짱만 끼고 방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탄식하였다. 나라와 민이 도탄의 위기상황에 처해 있는데 수수방관하는 것은 양심상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에 그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꽉 막히고 썩고 병들어 곪아터지기 일보직전인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변통밖에 없음을 간파하고 그 답을 실학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대 다수 유배자들이 한양에서의 해배(解配)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며 허송세월을 보내는데 반해, 그는 유배생활은 오히려 하늘이 자신에게 학문할 기회를 준 것이라 위안하며, 한문이 생긴 이래 양질의 면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통해서 썩고 병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온갖 방책들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바쳐 세상을 변통할 본말을 갖추어 놓았으니, 진정으로 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위정자라면 반드시 막힌 곳을 뚫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다산의 혁명적경세론은 그의 말대로 당시 시대상황상 이대로 두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한 지식인으로써의 소명의식이 이루어낸 시대적 산물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도를 넘는 극단주의와 황금만능주의, 도덕불감증,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되고, 정직하게 양심껏 순리대로 살아가면 손해 본다”는 식의 오도된 가치관이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이 같은 현상은 사회지도층으로 올라 갈수록 더 심각하다. 한마디로 위기 상황이다. 작금 대한민국은 200년 전 다산선생이“이대로 가면 조선은 반드시 망한다”며 개혁이나 경장보다 더 강력한 변통(變通)을 강조했던 시대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위기의 대한민국, 해법을 찾고자 다산에게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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