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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출신 조선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
2022년 03월 08일(화) 13:41 [i주간영덕]
 
글을 열며
1392년 고려왕조의 멸망하고, 이성계 중심의 신흥세력은 조선을 건국했다.
14세기 후반 동북 아세아의 국제정세는 커다란 지각 변동을 겪으며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진행되었다. 대몽고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의 후예, 쿠빌라이가 중원에 세웠던 원(元)나라가 쇠망하고, 한족(漢族)의 명(明)나라가 새로 일어나 패권을 차지하면서 고려(高麗)의 운명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왕건(王建)이 개국한 고려는 원나라의 침입으로 부마국(鮒馬國)으로 되었다.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상실하여 내부적으로는 부패와 갈등으로 혼란스러웠고, 대외적으로는 원‧명 교체기의 세력 충돌 속에 국가적 좌표가 불안정한 형세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고려를 지키려는 구세력과 개혁을 주창하는 신진세력이 대립하다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구세력의 중심인물인 최영 장군과 정몽주가 제거되고 이성계를 정점으로 한 신진사대부 집단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밀어내고 등극한 이성계는 1392년 여름 새로운 국가, 조선(朝鮮)의 개창을 선포하였다. 개국 초기의 신도읍지인 한성건설에 등장한 불세출의 건축가 박자청(朴子靑)에 관해 살펴본다.

조선 개국과 새 수도 한성(漢城)
새로운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는 고려 수도 개경(開京)을 떠나 새 도읍지로 한양 땅을 정하고 민심을 쇄신하고자 천도(遷都)를 단행한다.
왕도(王都) 건설의 시작은 도성의 구역 획정과 궁궐 및 관청의 규모와 위치 선정 그리고 민가의 조성 등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구체화 되었고, 경복궁 건축을 필두로 4대문과 성곽의 축조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수도의 이름을 한성(漢城)으로 정하고 수도행정의 책임자인 판한성부사에 성석린이 임명되었으며, 전국 8도의 백성들을 건설 현장의 인부로 동원하여 도시의 모습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왕자의 난으로 인해 개경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태종에 의해 환도(還都)하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본격적인 건설 작업으로 궁궐 ‧ 문묘 ‧ 행랑 ‧ 성곽 등 도성의 기본시설이 완성되었다.

건축의 달인 박자청(朴子靑)
새 도읍, 한성의 건설은 정도전(鄭道傳)이 설계하고 박자청이 실행했다고 후세 사람들이 말한다.
곳곳의 건설현장에서 공역(工役)의 망치 두드리는 소리와 짐 나르는 어영차 소리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박자청의 동독(董督:감독하고 격려)하는 활약에 따라 도성 하늘에 울려 퍼졌다.
본래 박자청은 군인 신분이었으나 임금(태조)의 발탁으로 건축물의 관리와 수선을 담당하는 선공감(繕工監)으로 직책을 옮기면서 건축 실무를 맡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성계의 고향 후배인 황희석(黃希碩)장군의 수행 군관이었는데 궁궐 입직 당번군사로 근무할 때, 왕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 이화(李和)가 무단출입하려 하자 이를 제지하였다. 임금의 아우인 자기를 가로막는 행동에 화가 난 이화가 그를 구타하였으나 막무가내 막아섰다.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조 이성계가 그의 충직함을 가상히 여겨 호군으로 승진시키고 어전 밖을 지키는 내상직에 임명하였다. 몸을 사리지 않고 경호를 하는 근면‧성실함이 마음에 든 태조가 은대(銀帶)를 상으로 내렸으며, 선공소감으로 임명하고 개국원종공신에 봉하였다.
그의 관직 승진을 요약하면, 황희석 장군의 수행 군관에서 시작하여 중랑장(中郞將)에서 호군(護軍)으로 승진하고 선공소감(繕工少監)으로 전역하였다가 다시 호익사 대장군이 되고, 이어서 공조와 예조의 전서를 오른 다음 중군총제를 거쳐 판공안부사에 이른다.
이후 공조판서를 시작으로 장관급의 관직을 군부와 행정부를 오가며 조정에서 부여하는 임무에 따라 삼군부의 진무나 지의흥부사를 맡았다가 지의정부사 또는 판선공감사 등을 맡고, 가장 높은 벼슬로는 판한성부사라는 재상직에 오른 다음 명예직인 판우군도총제를 끝으로 은퇴하게 된다.
이와 같이 화려한 직책과 고속 승진 영광의 뒤안길에는 백성의 노역이 과중하다느니, 불요불급한 공사를 마구 벌린다느니 하며 갖가지 구실을 붙여 그를 항상 질시하고 견제하는 불만 세력이 따르고,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일시적이나마 두 차례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여튼 그는 태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몸을 던져 일했다.
임금(태종)이 그를 위해 변명해 준 이 한 마디가 그것을 웅변한다.
“박자청이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다만 부지런하고 곧기만 하다, 종묘‧사직을 짓고 수리하는 일은 모두 내가 명하여 역사(役事)를 동독(董督)한 것이다. 어찌 한 몸의 계책을 위하여 이 일을 하였겠느나? ~ ~ 중략 ~ ~ 내가 비록 박자청을 파직시키더라도 대신하는 자가 바라보기만 하고 한 사람의 백성도 역사시키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경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박자청의 업적

그는 창덕궁 감역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경회루‧문묘‧행랑‧건원릉 등 조선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영건하였다.

ⓒ i주간영덕
① 창덕궁(昌德宮)
원래 창덕궁은 이궁(離宮)으로 지어졌다. 1차 왕자의 난으로 피에 얼룩진 경복궁이 꺼림칙했던 태종 이방원은 새로 궁궐을 지어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향교동 이궁이라 불렸는데 궁궐의 체모를 거의 갖춘 다음 창덕궁이라고 궁 이름을 새로 지었다.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正宮) 역할을 한 창덕궁이 도성 가운데에 지어져 탄생한 것이다.
“새로 지은 궁궐이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았다.”(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건축 미학의 절정을 이룬 창덕궁에 대해 그 형용(形容)을 아주 걸맞게 잘 나타낸 표현이다.
창덕궁 내의 모든 건물과 시설은 태종 재위기간 내내 영조(營造)된 것이다.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인정전(仁政殿), 임금의 사적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사신 접대와 대신들과의 연회 등에 활용하였고 태조가 승하한 광연루(廣延樓), 태종의 생모인 신의왕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인소전(仁昭殿) 등이 주요 건조물이었으며, 이에 따르는 왕의 편전(便殿)인 희정당과 선정전 등 부속 건물과 궐내 각사(各司) 등 각종 시설이 계속 지어졌다.
오늘날 UN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에서는 특히, 인정전 내부의 늘어진 커튼과 전등의 설치를 보면서 오백년 조선 역사가 태종의 거룩한 창업에서 고종의 참담한 몰락으로 급전직하하는 유산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또한 단청을 하지 않은 검소한 낙선재(樂善齋)에서 대한제국의 잔영(殘影)이 좁은 마당에 드리워져 가을바람에 굴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 i주간영덕
② 경회루(慶會樓)
경복궁 안 근정전 서북 편에 세워진 경회루는 박자청이 빚어낸 건조물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그는 단순히 공사의 감역을 잘 하는 능력 있는 관리로서만이 아니라, 건축적 심미안이 빼어난 인물로 평가해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원래 태조 때부터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기둥이 기울어져 이를 수리하였으나, 연못의 물고기들이 죽자 태종은 박자청에게 하명하여 규모를 키우고 연못을 늘려 새로 짓도록 하였다.
48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굉장(宏壯)한 누각을 올렸으며 연못은 물이 새지 않도록 바닥을 검은 진흙으로 빈틈없이 메워 안정감과 화려함이 함께 어우러진 환상적 경관을 이루었다.
사신을 접대하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연회장소로 사용하였던 경회루는 임진왜란의 와중에 누각이 소실되어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건축되었다.

ⓒ i주간영덕
③ 문묘(文廟)
문묘는 1410년(태종10)에 성산군 이직(李稷)과 동지총제 박자청이 감역을 맡아 완공을 보았다.
조선왕조는 유교사상을 국가이념으로 표방하였으며, 공자(孔子)를 숭상하는 일은 국가적 일이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과 우리나라 명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문묘가 제례행사를 위해 건축되면서 유학 교육기관으로 성균관을 병설하여, 제향과 교육의 두 가지 목적을 하나의 구역 내에서 실시할 수 있도록 배치해 놓았다.
문묘에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 등 부속 건물이 있고, 성균관에는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서재(西齋) 그리고 존경각(尊經閣)과 양현고(養賢庫) 등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④ 행랑(行廊)
조선 초기 1412년(태종12)부터 14년간에 걸쳐 혜정교에서 창덕궁 동구, 창덕궁에서 종묘, 종묘에서 동대문 종루(보신각)에서 남대문까지 간선도로 좌우에 2,020칸의 가게를 설치한 것이 행랑 또는 공랑(公廊)이다. 이 공역의 감독을 박자청이 수행하여 왕실‧관청‧양반 및 도성 주민들의 경제적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기여했다.

⑤ 살곶이다리(箭串橋)
박자청이 관직에서 은퇴하고 병들어 힘들 때, 시공 상의 공법에 어려움이 생기자, 그에게 조언을 구해 현장에 나가 감독함으로써 1420년(세종2)에 완성된 돌다리다.
이 다리는 박자청의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그를 지극히 총애하였던 태종이 승하하여 대여(大輿)가 무사히 지나간 곳이라 더 의미가 크다.
이 다리는 당시 한양과 강원도와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상의 주요 통로였으며, 현재 보물 제1738호로 지정되어 있다.

⑥ 건원릉(健元陵)
1408년 5월24일 태조가 광연전 별전에서 붕어(崩御)하자 약 6천여 명의 군사을 동원하여 역사를 시작하였고, 9월 7일 태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발인하여 장지(葬地)에 도착하였다.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으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박자청의 유물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지금부터 90년 전인 1932년 임시정부시대(일제강점기)에, 강원도 장양면 금강산 월출봉(1580m)에서 산불 저지선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석함(石函) 즉 돌로 만든 상자를 하나 발견하였다. 그 안에는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장엄구 일괄이 들어 있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보물 제1925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박자청에 관련된 유일한 개인적 유물로서 그의 묘소조차 없어 추원사업을 해오지 못하던 후손들에게는 매우 값진 조상의 유산이라 할 것이다.
이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의 팔각형 사리기의 은판 표면에 사리탑을 모신 내용과 이성계와 그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발원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백자 사발의 명문에는 사기장 심룡(沈龍)이 그릇을 만들고 승려 신관이 발원한다는 것 하나와, ‘금강산 비로봉 안유기(安遊記)’로 시작하는 또 다른 명문에는 “신미년(1391년) 5월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등과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1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 하생을 기다린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한 이 사리기의 발원문 가운데에는 여러 인물 중에 납자 월암(衲子 月菴), 영삼사사 홍영통(洪永通), 동지밀직 황희석(黃希釋), 박자청(朴子靑) 등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황희석에 이어 박자청의 이름이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영해 출신 박자청의 출신(出身) 배경
박자청을 언급하면서 조선 개국공신 황희석(黃希碩)을 빼 놓을 수 없다.
황희석의 본관은 경상도 평해(平海)이고 함경도 영흥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호족 출신이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부터 휘하 장수로서 맹활약한 인물이다.
그 시절에 박자청은 황희석의 가인(家人)으로 수행 군사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 황희석이 승승장구하는데 따라 박자청의 임무와 신분이 상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침내 이성계가 왕에 등극하고 황희석은 정계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면서 박자청을 궁궐 경비대의 입직군사(낭장)로 추천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왕의 이복동생 이화가 궁문을 무단출입하려는 것을 제지하다 구타당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호군으로 승진하면서 숙위군사로서 내상직(內上直)에 임명되었다.
이때, 상으로 은대(銀帶)를 하사받았고, 밤낮으로 순행하여 충성심을 인정받음으로써 태조3년에 선공소감(繕工少監)으로 옮기고, 이듬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박자청의 충성심과 임무 수행능력은 태종의 기대에 부응했으며, 그에 수반한 관직의 승진은 거의 파격적이라 할 정도로 화려하여서 재상 반열인 판한성부사‧공조판서‧판우군도총제사 등 고위직에 올랐다.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판한성부사(33대)는 조선 중기에 한성부판윤으로 바뀌어 부르다가 ‘한성판윤’이라고 통칭되고 있다. 또한 박자청의 영덕 출신으로 신분에 관하여 말이 있으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하고자 한다.
기록자에 따라 그의 초반 신분에 대해 보종(步從), 수종(隨從), 수졸(隨卒), 가인(家人) 또는 내시(內侍), 환관(宦官)이라는 용어가 개념상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수(隨)가 붙는 단어는 수행한다는 의미일 뿐이며, ’가인‘이라는 단어에서 황희석 가문에 속한 인물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가문 안에서 위계상 차별은 있으되 신분 계층상으로는 동격이라고 볼 수 있다. 노비에게는 조상에 대한 기록이나 성(姓) 또는 관향(貫鄕)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박자청은 노비가 아니다. 시조가 박제상이고, 영덕 출신 박씨 즉 영해박씨라는 자체가 노비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다만, 박자청의 입지전적 신분상승에 대해 흥미를 돋우기 위해 ‘일등병에서 대장까지’ 라는 식의 초고속 승진을 찬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천민에서 재상까지’가 바로 그것이다.

영해 박씨의 역사 인물
시조는 박제상(朴堤上)이다. 눌지왕 2년 고구려에 가서 볼모로 있던 왕자 복호(卜好)를 탈주‧귀국시키고, 왜에 가서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구해내고 화형을 당한 신라 충신이다.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9세손이며 파사왕의 5세손으로, 갈문왕의 손자이다. 따라서 신라 박씨에서 분관된 성씨이다. 그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바로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고, 이름이 박문량이다.
영해박씨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번성하였다. 신라에서는 무열공 박용문(朴龍文),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운 박경한(朴京漢),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급제한 박인범(朴仁範), 통문박사 박계업(朴季業), 견훤의 난에 비분하여 낙향한 박술홍(朴術洪)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광종 때 효행으로 유명한 박광렴(朴光廉), 문하시중 박도덕(朴度德)이 있으며, 현종 때 전법전서 박명천(朴命天)과 문하시중평장사 박송비(朴松庇)가 배출되었다. 특히 박명천은 삼중대광벽상공신에 추증되고 예원군(禮原君)에 봉해져, 예원은 영해의 옛 땅이름이라 영해를 현종이 관향(貫鄕)으로 내려 사관(賜貫)중조(中祖)가 되었으며, 박송비는 김인준(金仁俊)과 함께 무인정권의 최의(崔誼)를 죽여 위사공신‧금자광록대부에 올라 태자태사를 지냈다.
박용량(朴用良)이 상서좌복야, 박세통(朴世通)‧박홍무(朴洪茂)‧박감(朴瑊) 3대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다. 고려 말에는 박원계(朴元桂)가 전법판서를 지내고, 두문동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인 박심(朴諶)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박경(朴經)이 대사헌을, 한성 건설에 크게 공헌한 판한성부사 박자청(朴子靑)이 공조판서‧판우군도총제사에 올랐으며 시호는 익위(翼魏)이고, 박창령(朴昌齡)은 평양소윤을 지냈다.
이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단종 폐위에 비분강개한 박창령의 자손들을 포함 (박도. 박재.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박인손. 박계손)한 7인이 매월당 김시습‧박상치와 함께 산간에 은거‧불복하였다. <성씨의 고향(중앙일보)>

영덕 출신 박자청은 조선 건국에 설계자 정도전과 함께 조선 왕궁을 완성한 위대한 건축가이며, “태종이 새로운 한성을 만들 때 한성도성, 청계천 등 한성건설의 근간이 된 도시 시설과 공공 건축은 모두 박차정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죠.”

글을 마치며

내 고향 영덕 출신 ‘박자청’은 위대한 건축가이며, 영덕의 자랑이다.
하지만 영덕군민은 위대한 건축가 ‘박자청’을 알고 있는 분들이 몇 명이 있을까?
영덕은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미래의 관광도시로 만들어 줄고 들고 있는 인구를 늘이는 방법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영해박씨 종친회에서도 시조 신라출신 ‘박제상‘ 제 조명해서 영덕에 문화를 만들고 또 조상숭배를 해야 한다.
대마도에도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는데 비를 만들 때 영해박씨 종친회에게 단국대 교수님이 기념식수를 심는데 30만원 정도 필요하다고 나무 구입비를 요청했는데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대마도 답사에서 ”한교수 고향이 영덕이지” 노교수님의 서운한 것을 설명했다.
위대한 건축가 그리고 서울시장을 역임한 ‘박자청’을 영덕에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
역사적 영웅 ‘박자청’의 무덤도 없다고 한다.
후손으로 당연히 영덕군과 영해박씨 종친회에서 만들어야 한다.
15세기 초 판한성부사(한성판윤) 박자청 일대기를 살피면서 20세기 말 서울특별시장 김현옥을 연상해보는 일은 매우 흥미 있는 비교일 수 있다.
태종 이방원의 각별한 신임을 등에 업고 박자청이 좌고우면하지 않으면서 조선 초기 한성건설에 매진하였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김현옥은 현대도시 서울을 건설하는 견인차로서 수도 서울을 획기적으로 변모케 한 선도자였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의 추진력을 갖고 도시개발을 했던 김현옥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호령을 하며 새 도읍지 한성 건설을 독려하였던 모습에서 두 인물의 유사성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600년 만에 환생한 역사적 인물 ‘박자청’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나타났고, 그 후 조선일보 등 다른 매체에서도 소개되었으며 최근에는 KBS에서 팝오페라 형식으로 방영하여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세종시대의 ‘발명가 장영실’을 TV 드라마를 통해 익히 알게 되었듯이, ‘건축가 박자청’이라는 또 한 사람의 역사적 영웅과 시‧공간을 넘어 만날 수 있다.
21세기는 과학의 시대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건축을 추구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의 분발과 각계의 관심 그리고 후손을 비롯한 일반인의 참여로 ‘건축가 박자청’을 이 시대에 불러내 번영하는 대한민국 서울을 재창조해 보면 어떨까?

글쓴이 : 신구대학교 교수 역임
사단법인 단군성전 현정회 총무이사
재단법인 대한인쇄연구소 소장
한 영 국
주간영덕 기자  
“언론사 & 단체 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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