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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숲속 오솔길 위에 노년의 삶을 싣고...
2015년 12월 23일(수) 10:43 [i주간영덕]
 

ⓒ i주간영덕
실패와 좌절, 성공과 기쁨을 경험하면서 나는 어느 듯 삶의 전장에서 물러나 노년의 산촌생활을 시작하였다. 인생이 무엇인지? 길이 어디에 있는지? 무던히 알고자 갈구했던 젊은 시절의 끓는 순수한 피는 이제 다 소진하고 황혼기에 접어들어선 노년이 되어 숲속 오솔길 위에서 그 답을 찾는다. 길이란 이동수단, 방도, 도리와 같은 다양한 뜻이 숨어있다. 특히 숲속 오솔 길, 해안 길, 들길 등 옛길을 걸으면서 젊은 시절에 인생이 무엇인지를 자문자답했을 때를 생각하면 실소와 미소가 지어진다.

지난 날 마음의 무거운 짐도, 갈등과 고통도 지금의 노년의 삶에 연결된 한 조각의 퍼즐이어서 다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 될 징검다리인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지난 젊은 시절의 사랑, 미움, 우정, 배신, 기쁨, 슬픔, 그리움, 아쉬움, 성공, 실패, 행복, 불행 이런 모든 삶의 순간들을 길 위에서 되새김질해 본다. 숲속 오솔길을 걸으면 주변의 나무와 풀, 나비와 꽃, 다람쥐와 토끼, 바람과 구름, 땅과 하늘 등 자연의 만물이 신체의 오감을 부활시켜 환영을 보기도 하고 자연과 일체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곳은 삶에 지친 심신의 피로와 아픔을 치유하는 종합병원이었고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학교이었다.

공직에서 명예로운 퇴임을 한지 훌쩍 4년이 지났다. 오늘도 숲속 오솔길 위에서 나는 지난 젊은 시절의 길 위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떠올린다. 새벽 산책길, 낮 등산길, 저녁 나들이길, 밤 달빛길 등 하루 시간대에 따라, 사계절에 따라 같은 장소의 길일지라도 다른 풍경을 만나고 지난날 힘들었던 고통의 일들도 쉽게 떠올리고 가볍게 재해석 할 수 있다. 목적지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하는 학교 등굣길, 회사 출근길은 때에 따라 즐겁기도 하지만 싫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다. 어린 시절 학교의 등굣길은 늦잠이라도 잘 때면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세수는 고양이 세수로 때우고 뛰다시피 하여 가도 지각일 때가 많다. 그럴 때에는 꼭 준비물을 잊어버리고 선생님께 혼나는 날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 회사 출근 길 역시 교통 혼잡으로 지체되거나 교통사고라도 나면 마음은 급해지고 하루의 일정은 뒤죽박죽 되어버린다. 지난 밤 친구나 동료들과 과음하거나 늦은 야근으로 두통과 피로가 겹쳐 입술이 마르는 날이면 고통의 출근길이 되었다. 비, 눈, 바람, 안개 등 날씨가 불순하면 출근길은 마음도 어둡고 우울하다. 이런 길은 이제 나에게는 하나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싫던 좋던 버릴 수도 없는 평생의 자산으로 내 기억의 공간에 저장하여 두고 좋은 경험으로 바꾸리라.


동틀 무렵 잠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마당을 벗어나 계곡을 따라 산골짜기로 나 있는 오솔길 위에 서 있다. 나의 일과는 오솔길 위에서 시작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산 넘어 동해바다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있는 침묵의 순간을 맞이할 때면 성스럽기까지 하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을 뒤로하면서 나아갈 때 어느 듯 산의 형체도 주변의 나무도 풀도 첫 손님을 반긴다. 게울 물소리는 어둠을 몰아내는 주술이었던가, 아침햇살을 맞이하는 사계절 생명체 얼개는 신비롭다. 아침 햇살과 신선한 공기는 나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에너지가 솟아나 자연을 사랑하고 관찰하는 인지능력도 평소와 다른 내가 된다.

봄에는 생강나무, 산수유나무는 노란 꽃손을 흔들고, 돌복숭아나무는 붉은 색이 감도는 분홍꽃잎 손뼉을 친다, 산돌배나무는 흰 꽃잎이 이슬방울을 머금고 기다린다. 여름에는 산초 나뭇잎 위의 호랑나비 날개를 말려주고, 조금 떨어진 산딸기 꽃에 앉은 일벌의 몸을 녹여준다. 굴참나무 줄기에 매달려 있는 참 매미는 아직 몸을 덜 말렸는지 울지도 날지도 못하고 낮선 손바닥 안으로 들어온다. 마른 가지 위에 앉은 잠자리는 이슬방울 달고 투명한 날개를 펼치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가을에는 곱게 물던 나뭇잎에 매달린 고치 속 번데기 방의 냉기를 없애준다. 겨울에는 대지에 떨어진 식물의 씨앗과 땅속 겨울잠을 자는 동물의 모닥불이 된다.
봄의 아침 햇살은 숲속 식물과 곤충들의 에너지이며 식량이다.

여름 녹색 나뭇잎은 곤충들의 식량이며, 새들의 서식처요, 휴식처이며 피난처이다. 가을 단풍잎은 바람의 장난감이며, 떨어진 낙엽은 대지의 이불과 거름이 된다. 겨울 소나무 솔가지 위에 내려앉은 눈은 하늘을 더욱 푸르게 만들고 솔가지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복수초의 노란 꽃이 되는가 보다. 사계절의 숲속 오솔길은 공간적으로 하나일 지라도 싫증나거나 단조롭다거나 다른 곳을 염탐할 생각도 할 수 없는 언제나 특유의 이벤트로 나를 맞이한다. 움직이지도 변화하지도 않는 자연물은 아무것도 없구나! 이런 듯 변화하는 것이 진리이고 아름답거늘 우리 인간이 언제나 젊어지고 불로장생하기를 바라겠는가?

봄비에 식물들은 고개를 숙이고 하늘에 경배 드린다. 여름 햇살에 훌쩍 커버린 녹색식물의 세계는 안개가 피어날 때 동서남북 방향도 깊이도 알 수 없어 두렵고 경이롭다. 가을바람에 곱게 물던 나무의 단풍잎도 다 떨어지고 나면 대지는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다. 겨울눈은 부끄럽게 여기던 대지의 속살을 감추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꽃 옷을 입히고 소나무를 더욱 푸름을 돋보이게 한다. 사계절 밤마다 별들의 세계를 쳐다보면서 전설을 노래하고 유성의 기운을 받으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보름달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그네의 길동무가 된다.

숲속 오솔길에서 향긋한 솔향기와 감미로운 새들의 노래 소리, 눈길 끄는 앙증맞은 야생화, 시원한 굴참나무 그늘, 머루랑 다래의 새콤달콤한 맛을 볼 수 있다. 감동적인 영화를 대형 스크린에 상영하는 극장이다. 돈도 들이지 않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해방된 건물 없는 극장이다. 자연의 무대, 촬영세트장 맞게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 대본을 수정도 하면서 마음대로 연기하는 배우가 되기도 한다. 피톤치드, 테라펜, 음이온을 함유한 불로의 공기를 가슴속 깊숙이 마실 때면 상쾌함을 넘어서 행복감에 젖게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나 자신조차 잊어버리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만이 존재하는 무한의 시간대에 머물 뿐이다.

오늘도 숲속 오솔길은 인생을 배우고 깨닫게 하는 스승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숲속 오솔길은 자연의 아름다움만 보고 감상만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오묘한 진리와 함께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와 이치를 터득하는 좋은 장소이며 도서관이다. 믿음직하고 묵직한 바위 의자에 앉아 사랑과 믿음, 정의의 실천을 다짐하고 부드럽고 포근한 풀잎 양탄자에 누워 비움과 나눔, 공존의 철학을 배운다.

지난 시절 관료주의 사회에서 보이는 것만 믿고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고 일과 명예만 쫓아다니던 바쁜 길을 벗어나 이제는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 바람과 자연물의 영혼을 알고 푸른 하늘의 구름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을 보고 인생살이의 어려움도 언젠가 볕이 들 날이 올 것을 알았다. 보이는 물질의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가 더 넓고 더 힘이 세고 더 높음을 믿게 되었다. 내게 있어서 숲속 오솔길은 공간의 확장, 시간의 확장으로 더 많은 삶의 시공간을 제공받을 수 있어 노년의 삶의 넓이와 가치를 높여 주었다.

수헌 장은재 이학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
주간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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