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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감 넘치는 모교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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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20일(월) 09:41 [i주간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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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덕초교 35회 졸업생 강신종
(현,영덕군교육삼락회장) | | ⓒ i주간영덕 | | 1. 글머리에
회고에 앞서 아련히 흘러버린 지난날을 잠시나마 뇌리(腦裏)에 그리면서 그 옛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엄마 품같이 정겨운 모교에 스민 희비애락을 반추하며 감히 회고에 대 하고자 한다.
정든 모교를 떠난지도 1947년도 이기에 70년 가까이 되니 말이다.. 흔한 말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논리에 비유한다면 여섯번이나 변하고도 남으니 꽤나 긴 세월임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적인 변화는 물론 물리적인 변화, 또한 그러하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학교건물, 운동장, 스탠드, 교내의 수목, 교재원, 체육시설 등, 더욱이 신축한 새교사 (2014년 준공)의 웅대한 건물 등---
이제 그 정든 모교의 학창시절과 모교에 근무한 교원시절을 바탕으로 꿈 같이 떠오르는 지난날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2. 강점기의 모교 학동시절
가. 일본 강점기 하의 입학과 저학년 때의 학동시절.
필자가 모교에 입학할 땐 1941년 4월 1일 이니까, 왜정의 강점기로 2차 셰 계 대전(1941년 12월 8일 )이 발발 얼마 전이었나 보다.
학교 입학 땐 교복을 의무적으로 각자 구입하여. 입학식 때 착용토록 하였 으며 왼쪽 가슴에 타원형의 흰 프라스틱 명찰을 달고 전원 입학식에 참가 하였다. 학반은 3개 반으로 1, 2 반은 남학생, 3반은 여학생으로 편성하였다..
필자는 1반으로 담임선생님은 연세가 지긋한 한국 사람으로 건강상태가 그 다지 좋지 않는 것으로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 후에 4학년 때 담임, 해방직후 엔 모교 교장으로 근무하시다 대구 공고로 전출하셨으며 고인이 된지 오래다. 창시명은 사이또--? 우리말로는 권 성 선생님으로 기억난다).
2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연세가 꽤 지긋한 분(한국인)으로 교두(왜정시대엔 교감이 없었으며 지금의 교무부장에 해당된다고 추정)로 2-1반 담임 즉 필자의 담임선생님이었다(창시명은 히로모도 ? 선생님).
기억나는 것으로는 9, 9단을 익히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들 특유의 억양에 맞춰 교단에서 긴 교편을 쿡, 쿡, 짚으며 왔다 갔다 하시면서 리듬을 잡는 것이 지금껏 기억에 남는다. 그 후 태평양전쟁이 발발( 1941, 12, 8.)하자 학교 생할도 점진적으로 전시체제로 변해 가는 듯한 느낌을 어린 생각으로나마 어렴풋이 감지하였다..
나. 격화되어가는 2차 세계대전 때의 중학년시절
중학년(3학년)때 이르자 학교경영체제부터가 달라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회 땐 훈화 전에 동쪽을 향해 일본 천황이 있는 곳 (도-쿄,궁성)으로 향해 건승을 기원하는 경례를 90도로 굽히는 의식도 가졌고 매달 8일이면 지금의 덕흥사가 있는 곳에 신사( 일본 개국신을 모신 곳-천조대신)에 가서 참배를 하던 것도 필수적이었다.
특히 어린 시절, 겨울철에 그 곳 계단( 32 계단으로 추정 됨)을 오르내리기, 특히 높은 곳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안고 한시간 이상 의식행사(참배)에 극복하기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당시 아랫바지는 계절에 관계없이 전원 반바지를 착용토록 하였으며 긴 바지 착용 학생은 조례 후에 남도록 하여 교사들로 하여금 가위로 무릎까지 자른 후 입실 시킨 것도 기억에 남는다.
식생활도 말 할 수 없는 궁핍한 생활이었다. 대부분 영세 농가로 피와 땀으로 지은 벼농사마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대부분 빼앗아 가고 얼마 남지 않는 식량으로는 태부족이어서 춘궁기에는 대두밥으로, 시레기로, 보릿겨, 로 간신히 연명하는 것이 죽지 못한 생활수단이었다.
중식은 그래도 가정에서 식사하도록 외출은 허용하였으나 가정에서의 식생 활 또한 몇 사람을 제외하곤 나를 비롯한 대다수가 궁핍한 식생활이기에 더 이상 불문가지다.
이 모두가 나라 잃은 설음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나?
지금 생각하면 이 모두가 민족말살정책. 승전의식고취. 애국심함양. 식량증산 .등이 그 목적이었다.
2차 세계대전도 한때는 전세가 호전되어 동남아의 싱가폴 까지 함락하여 전
리품으로 운 좋은 급우들은 운동화 또는 고무공을 타기도 하였으나 나는 불운하게도 혜택을 받지 못해 무척 아쉬웠고 서운해서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를 못 했다.
호전되던 전세도 잠시,- 연합군의 대반격으로 전세는 날로 불리해 갔다. 3학년 때로 기억이 난다. 지금의 서편 체육관 북쪽에 3 교사(목조건물)*-1가 있었고 3교사 동편 벽면에 시사교육용으로 전황판을 설치하였고 주기적으로 전황을 게시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세가 유리하였으나 그 후 점차 점령지를 잃게 되었나 보다. 그 중 하나가 “아쯔섬(서 태평양) 옥쇄”로 일본군이 전원 전사하였다는 담임선생님으로 부터 애절하고 비통한 말씀으로 유도해 전원 교실에서 멋 모르고 울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4학년 때 들면서 등교 시엔 식량증산을 위한 일환으로 퇴비 제조용으로 녹 초를 매일 20 kg 정도를 메고 교문에 들어가야 선도반이 교내 입문을 허락 했다.
다. 혹독한 작업(근로)?
전황이 날로 악화되자 1, 2교시는 정상수업을 하고 3, 4교시는 작업 시간 으로 대체하여 퇴비용 녹초를 한뭉치(25-30kg) 해 가야 오전 책임을 다 하는 것이다. 오후엔 지금의 천전 대교 건너 과수원이 있는 곳으로 당시엔 자갈 밭으로 아주 쓸모없는 황무지로 그 자갈밭을 개간하는 것이다. 식량증산을 위한 국가시책인지? 아니면 학교계획에 따른 증산게획인지는 모르지만 아뭏던 그 자갈밭에 호박을 심기로 했나보다.
우선 조별로 조 편성을 하고 괭이로 호박 심기. 구덩이를 파고 자갈을 골라내고 학교에서 녹초를 수합하여 만든 퇴비를 넣고 흙을 깔고 씨앗을 뿌리고--- 어느덧 싹이 트고 잎이 자라고 줄기가 벋고넝쿨로 변학고 --그런 호박에 고통도 한순간,-날로 자라나는 호박에 애착이 부풀어만 갔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이 더 큰 문제였다. 즉 물주기가 큰 어려움이었다. 칠, 팔월 땡볕이 이튿날만 계속 될 때면 전날 오후 아무리 흠뻑 물을 주어도 다음 날 오후면 잎이 시들하니 그 실망이야말로 말로 못 할 지경 이었다. 그야말로 “자갈밭에 물주기” 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교직생활시 들은 말이지만 도내에 증산왕으로 1등을 했다고 하니 그 결과는 고통과 피와 땀으로 얻어진 노력이리라. 생각되었다.)당시 운동장은 지금보다 훨씬 좁았다.
다시 말하면 그때의 정류소는 지금의 명광다방의 자리로 강구에서- 금호-우곡 앞 도로- 5일 시장- 구 매일 시장-영덕 정류소(명광다방 있는 곳)로, 영해 행 통로는 정류소에서 구교육청 앞으로-지금의 금옥식당을 거쳐 모교 동문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곡선이었으며 지금의 바위 (정재홍 씨 라고 새겨진 바위-개인소유의 토지이나 학교를 위해 헌성하신 분-그 후 필자가 모교의 체육부장으로 근무 할 때 “복 바위” 또는 “마스코드”라 이름 하였고 대외 경기 출전시 승전을 기원하는 고사 (기도)도 올렸다.
어린시절의 바위 위치는 도로 남쪽 건너 편 논 가운데 있었다. 좁은 운 동장 안에는 학반 별 퇴비장과 실습지가 있었으니 실제 운동장은 조례하는 장소밖에 되지 않았으나 체육수업은 물론 가을 운동회도 그런데로 간신히 치루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토요일 ,일요일은 또 근로 작업이 있었다. 산에 가서 오 리나무 열매 따기, 칡넝쿨 베어 껍질 벗겨 속줄기와 껍질 가져가기, 싸리나무베어 껍질 벗겨 가져가기, 솔광이 베어 가져가기---이런 근로 봉사는 당시 학생들은 모두가 당했던 일들로 학교에 다닐려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두가 전쟁수행을 위한 군수품자료 이리라.)
이런 일들은 누구나 목표량이 있었고 개인 별 실적은 교실 뒤 게시판에 그래프로 게시하였다. 이런 일들은 해방이 되기 전 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잊을 수 없는 일은 5학년 때 양돈 당번이다. 당번이 되면 2인이 1조가 되어 4교시에 큰 깡통을 메고 시내 여관으로 다니면서 잔 밥을 수거해서 돼지 밥통에 담아 주는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돼지우리 청소 문제로써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깨끗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담임선생님의 때마다 실시하는 검사(미진 때는 체벌) 때문이었다. 그 때의 악취는 감수성이 빠른 때의 일이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악취가 코를 찌르는 듯하다.
라. 운 좋은 날날이 갈수록 전세는 불리하게 되고 그런 날을 대비한 공습대피훈련도 강화 되었다. 어느 날 오전 일과를 마치고 오후, 여느 때와 같이 천전 실습지에서 작업을 하던 중 느닷없이 무릉산 쪽에서 비행기 4대(1개 편대)가 강구항 쪽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면서 동남쪽으로 사라졌다. 그 후 영덕 시내에선 얼마 후 주민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천전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지금 생각하니 이는 너무나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 될 뿐이다.-( 成服 後 藥訪問 )비행기는 이미 멀리 사라진 다음이니까, 그런 와중에도 우리들은 작업을 하다 말고 아까시아 나무 밑에서 3,3. 5,5 땀을 훔치며 전세가 종말이 되었 다는 말을 우리들 나름 데로 서투른 일본말로 수군 그렸다.(물론 입학 때부터 점진적으로 우리말은 입 밖에도 못 내었고 완전 일본말로 생활화 되어갔다.)운 좋게 그날 오후는 작업을 하지않고 전원 귀가로 날듯이 기뻤다.
마. 또 하나 나만이 갖는 궁금증
4학년 때 당시 칙어 (지금의 국민교육헌장과 비슷한 것)를 외우는 사람은 남아서 담임선생님의 검사를 받도록 되어 있어서 3번째로 검사에 도전했으나 첫째 줄 억양(?)에 네 번 이나 불합격 되었다.
(그 억양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운 좋게 담임선생님께서 바쁘셔서 급장 (지금의 반장)이 검사를 대행하게 되었다. 반장 덕택으로 거뜬히 합격은 되었으나. 이미 내 앞에는 10 여명 이상이 합격되었고 그 명단은 이미 내 앞에 게시된 후였다.. 억울하기도 하고 담임선생님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으며 한편 회장이 한없이 고맙기도 하였다..
그런 생활이 꽤나 오래 흐른 후 그 지긋 지긋한 일제의 쇠사슬에서 자유를 찾게 되었다. 시내 곳곳에선 조선독립만세 라는 현수막이 붙여졌으나 전연 우리말로 읽지를 못했다. 얼마 후 연합군(미군)이 영덕에 진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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